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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이론공부

이미지의 기록에 관하여

by 창조하는 인간 2021. 12. 14.

1장 그림의 시대

 

고급 예술 이미지가 19세기 중엽 사진의 도전을 받기 전까지

현실을 표상하는 가장 세련된 수단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한 고찰.

그림은 현실과의 어떤 마술적 유사성이 정의하는 것이 아니라,

롤랑바르트 “현실효과”“현실 효과”를 창조할 수 있는 그림의 능력이 정의한다.

 

(1) 중세와 근대를 가로지르는 원근법

영상문화 창조의 열쇠는 이해 가능성이지, 과학적 사고와의 조화 가능성이 아니다.

주요 사례로는 원근법, 2차원 시각 이미지에서 깊이감을 전달하는 데 사용되는 수렴선 체계를 들 수 있다.

원근법은 중세 시각 이론과 세상을 그리려는 근대적 욕구의 혼성이다.

유럽예술에서 보편적이게 사용되던 원근법, 그러나 눈의 작용은 여전히 미스터리였다.

알하젠의 시각피라미드중세와 근대 초기 시각 개념의 주요 요소..

원근법을 창안, 유지한 14~5 세기 이탈리아 예술가들.

대표적 인물로는 레오나르도 다빈치.

 

https://m.blog.naver.com/nuctom/220985631549?view=img_3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원근법 퍼펙트 최후의 만찬을 그리기 위해 예수님 머리에 못을 박은 레오

최후의 만찬 레오나르도 다빈치 템페라 460 x 880 cm 1494~1498 산타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수도원, 밀라노 ...

blog.naver.com

 

원근법은 모든 사물들에 대한 보편적 판단.

동공의 각 부분은 시각적 힘을 소유하고 있으며, 그 힘은 원근법 주의자들이 원하듯 그렇게 한 점으로 축소되지 않는다

동양의 예술가들은 이미 10세기부터 깊이감의 환영을 제공하는 법을 알고 있었고, 그들은 평평한 회화 공간을 사용했다.

표상의 세계를 창조하는데,

그 체계에 의해 상상된 이상적 관찰자와 그 이미지를 바라보는 실제적 관찰자는 서로 구별되지만,

종종 같을 때도 있다.

 

포르타의 카메라 옵스쿠라에 대한 기술

= 다양한 이미지를 형성하면서 당신을 옮기는 효과가 있는 탁월한 체험을 창조하는데 원근법을 사용했다.

 

출처 : 월간 산 (http://san.chosun.com/m/svc/article.html?contid=2011033101430)

 

(책의 내용과는 별개로 조선에서도 카메라 옵스큐라의 기법을 활용하여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https://www.youtube.com/watch?v=2OeQh3emSnQ 

 

그 외 1638년 프랑스의 수사 니 세롱은 당시의 원근법에 대한 견해를 마법의 관점에서 요약.

원근법이 최근에 창안된 것이 아니며, 엘리트 예술과 과학보다는 대중의 엔터테인먼트와 더욱 관련이 있다고 주장.

17세기 과학자들이 시각의 이해를 급진적으로 변형시켰을 때도 그대로 유지되었다.

 

네덜란드 학자 토마스 케플러 : 눈의 수정체가 망막에 전도된 상을 현시시킨다고 최초로 주장.

데카르트의 이론, 빛을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물질적 실체로 간주함으로써 전통에 도전.

 

빛의 물리적 개념은 데카르트로 하여금 빛의 모든 특성에 수학을 응용하게 했다.

눈에서의 굴절 작용, 즉 광선은 굴절을 파악함으로써 오랜 문제였던 거대한 물체에 대한 지각 작용을 설명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망막의 표면으로부터 뇌에까지 이르는 지각 작용 자체를 배제했다는 사실이다.

데카르트는 시각의 물리학에 대한 이해를 변화시켰지만,

영혼을 감각적 지각 작용의 해석적 판단으로 이해하는 케플러 모델에 계속 의존했다.

데카르트의 시각체계에서 표상은 유사를 대신한다. 원근법, 외양, 표상, 그리고 초상이라는 단어들은 동일한 것의 다른 이름이다.

다시 말해서 원근법 학습은 학생들이 회화 자체가 필요로 하는 모든 측면들을 수행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http://www.allthatmath.com/bbs/board.php?bo_table=sub_113&wr_id=321 

 

과학자 데카르트 : 수학적 방법과 기계적 철학으로 우주를 설명 > 공지사항 | 올댓매스 수학전문

 

www.allthatmath.com

 

 

원근법이 한쪽 눈의 지각 작용을 재생할 수 있을 뿐vs 양쪽 눈으로 봄

16세기 회화에서부터는 타협된 형태의 원근법을 사용했다. 건물과 배경에는 원근법을, 인물은 고전적인 비례로 그렸다.

인물들은 원근법으로 그려지지 않았다. 다비드는 수학적 정확함을 추구하지 않았다.

대신 그의 목적은 18세기에 진리의 외연으로 알려진 즉 박진성 혹은 현실 효과에 있었다.

원근법의 대중적인 대안은 왜상이었다. 이것은 소실점이 상 앞이 아닌 그림 표면의 한쪽면 혹은 반대쪽 면에 구축되는 체계다.

근대 초기,.

건축가들과 미술가들은 현실의 환영을 창조할 수 있고 시각 이미지의 힘을 통제할 수 있는 도구로 원근법을 택했다.

이에 응해 대중의 시각적 문화는 상류층의 허식을 풍자하면서 원근법의 변형을 오락의 형식으로 사용했다.

근대 이론가들이 공통적으로 주장한 것은 원근법은 관찰자 주체를 위해 비어있는 어느 장소를 새긴다.

그곳은 가장 강력한 위치 고신의 장소며 좀 더 광범위하게 말하면 궁극적으로 중요한 것의 장소다.

그런데, 17~8세기에는 권력의 장소가 시각적 문화에 새겨지는 것을 차단하는 것이었다.

파놉티콘, 간수들은 스스로를 보이지 않고도 감옥을 볼 수 있었다. 간수의 통제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신체의 정치란 왕의 하인들에게 표명되는 왕의 상징적 권력이다.

반면에 파놉티콘에서는 누가 보고 있는지가 중요하지 않다.

이처럼 원근법은 시각적 영역에 질서를 세우고 보기 위한 장소를 창조했다.  

 

 출처 :  위키백과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thumb/1/11/Panopticon.jpg/1280px-Panopticon.jpg)

 

(2) 원근법을 보완한 색채 

파놉티콘의 체계가 구축한 훈육은 공간의 질서를 잡는 원근법과 그 밖의 기하학적 체계에서의 미리 상정된 반대에,

심지어 색채에 까지 영향을 미쳤다.

특히 색채는 원근법에 완전히 대조적이기보다는 오히려 원근법을 보완하는 흥미로운 사례를 제공한다.

색채 지각 작용은 분명 인간의 시각에서 중요한 요소다.

1822년 루이 다게르가 창안한 디오라마는 역사와 세계여행의 역동적 광경을 움직이지 않는 관찰자에게 보였다.

(원근법 시점에 의존하여 엄청난 인기 얻음.)

색채의 예술적 사용은 사용주체의 과학적 이해와는 달랐다. 헬름홀츠가 그 간격을 좁히는데 공헌했다.

19세기 초 가장 대중적인 미술 형식들 속에는 원근법 효과가 자리했었고,

당시 낭만주의는 회화를 구성하는 데 가장 좋은 수단으로 색채를 장려했다.

 

(3) 색채의 표준화와 색맹

색채의 지각 작용을 둘러싼 시각의 표준화는 색맹을 그 예로 설명할 수 있다.

19세기  초 안과 의사들이 색맹을 처음 발견했다. 그리고 색맹을 진단할 방법을 고안했다.

색을 많이 쓸수록 미개하다는 인식이 팽배해있던 권위주의적 시각이 존재했으나

(원시시대 벽화는 점점 색을 썼지만, 그리스 인들의 색은 흑과 백이 아니었을까 하는 주장),

덧없는 색채의 흔적에 인종 과학적 차원을 보탬으로써

색맹이란 보편과는 아주 거리가 먼 것으로 드러난 주관적 색채 인식에 객관성의 차원이 복원될 수 있었다.

 

(4) 빛, 색채의 지배자

19세기 아방가르드 미술은 낭만파와 인상파 미술처럼 보통 인종적 편견과는 거리가 먼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미술에서의 색채의 지배, 그리고 빛에 대한 그들의 훗날의 주장은 종종 인종화된 이미지 같은 것을

명시적으로 혹은 함축적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낭만가 미술가 외젠 들라크루아는 자신의 색채 체계를 처음으로 분명하게 이론화했다.

낭만파 미술가들은 선형적 소묘에 의해 표상된 고정되고 관례화된 문화에 대해 색채를 자연적 대위법으로 사용한 반면,

자동 발생적인 색채 응용은 결코 장려하지 않았다.

미술은 색채를 고립시키고 빛의 농도를 사용하여 하나의 이미지를 만든다.

그 빛의 농도는 상대적으로 안정적이며, 항상 비례 내에서 입증이 가능하다.

즉 빛은 색채를 훈육한다. 북방 인종은 남방 인종을 훈육시킨다는 확대해석.

고흐는 급진적이지 않았으나, 현재는 천재의 원형이 되어있는 아이러니.

 

                                                                                     들라크루아, 민중을 이끄는 자유                                                                                    출처 :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Eug%C3%A8ne_Delacroix_-_La_libert%C3%A9_guidant_le_peuple.jpg

 

(5) 흰색으로 살핀 19세기 색채관

흰색은 우리를 고대 그리스에서부터 스페인의 남미 정복과 파시즘의 등장으로 데려간다.

흰색은 서양미술의 근원이요, 알려진 형식 가운데 최고라고 여겨지는 그리스와 로마의 조각으로 이끈다.

그러한 조각들의 미는 순수한 흰색 대리석에 축도되었다. 흰색은 그리스인의 세련된 취향을 전하기 위해서,

단색 시각의 증거로서 내려왔지만, 1930년대에 그 믿음은 깨졌다.

어떻게 동일한 색채가 인종적 우위를 지니고 그 이름을 말할 수 없었던 사랑인 동성애 개념들을 일으킬 수 있었을까?

 

(6) 사진의 시대로 향하다

오늘날에도 일상적이 사진은 거의 컬러이긴 하지만, 그래도 예술 사진은 흑백에 훨씬 가깝다.

색채가 침입한 사진 영상은 눈을 당황하게 함으로써 정확성에 대한 요구를 무너뜨렸다.

채색 사진을 범주화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근대 초기 이래로 영상 이미지를 지배해왔던 형식의 규칙들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되었음을 보여 준다.

이제 유사는 카메라에 속하지, 원근법이나 색채에 속하지 않는다.  

시각적인 문화는 사진의 시대에 진입했다.

 

관련 서적

<비주얼 컬처의 모든 것 > - 생각을 지배하는 눈의 진실과 환상 

니콜라스 미르조에프(지은이), 임산( 옮긴이) 홍시 

2009-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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